궁궐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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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덕수궁은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1895년 갑오왜란과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갑오왜란 이후 일제의 침탈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의 위상을 유지하고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극적인 아관망명을 한 후 1년여간의 철저한 준비를 거쳐 1897년 광무개혁의 청사진을 가지고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이어 황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던 대한제국과 고종의 근대화 시도는 가시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대륙침략을 꿈꾸던 일제와 열강들의 잇권으로 그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심지어 1904년 고종을 태워 죽이려는 덕수궁 대화재를 일으켰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만국에 일본의 불법적 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자 이윽고 고종황제 강제퇴위 시킨 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청(현 서울시민청)과 관련된 중앙공원 조성으로 궁궐이 훼손되어 해방 이후 현재까지 복원은 커녕 가장 왜곡된 근대사의 역사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갑오왜란 등 두 차례의 국난을 맞이해 자주독립을 지키려던 덕수궁은 최근 상시 야간개방으로 궁궐의 고즈넉함과 처절한 대한제국의 역사가 한데 어우러져 많은 관람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